훈육 그것은 사랑의 다른 말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육아 예능을 종종 봅니다. 오은영 박사님의 찰떡같은 솔루션도 좋고, 패널들의 태도도 비난보다 공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보기에 불편하지 않더군요. 가끔 영상에 달린 댓글을 읽어보기도 하는데, 아주 간혹 ‘준비된 사람이 애를 낳아야지. 왜 애를 낳아서 애만 고생시키냐. 엄마 표정 봐라. 자격이 없다.’ 등의 비수 같은 댓글들이 있어서 놀라곤 합니다.
사실 저는 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금쪽이들의 모습을 우리 집 두 아이에게서 종종 발견하곤 합니다. 제 뜻이 관철될 때까지 고집을 부리는 모습, 엄마가 못 본 사이 오빠가 동생을 혹은 동생이 오빠를 때리는 모습, 새로 만난 또래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모습, 혼내는 엄마에게 거친 말로 대드는 모습, 소리 지르며 우는 모습, 손가락을 빠는 모습 등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저희 아이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저는 거기 나오는 부모님들의 마음이 너무도 이해가 되어서 볼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집이며 아이들이 다니는 기관, 아이들과 본인들의 얼굴을 모두 노출하면서까지 방송 출연을 결심했을까, 그 마음을 먹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의 시간을 거쳤을까 생각해보면 눈물이 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
그런 말이 있죠. 누구나 처음은 서툴고 실수투성이일 겁니다. 처음부터 뭐든 척척 잘 해내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처음의 서투름이 쌓이고 쌓여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거지요. 그런데 유난히 부모라는 자리에 대해서는 그 서투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요. 준비가 안 되었으면 애를 낳지 말라는 댓글은 그래서 더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애를 낳을 ‘준비가 되었다’는 건 대체 어떤 경지에 오른 걸 말하는 걸까요?

저희 집 두 아이는 좀 어려운 아이들입니다. 제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내 새끼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아이들입니다. 두 아이 모두 자기주장이 강하고, 고집도 센 편입니다. 낯가림도 꽤 심하고, 환경 변화에도 매우 예민한 편이죠. 그런데 저는 또, 다른 엄마들에 비해 엄격한 편입니다. 엄한 환경에서 자랐고, 완벽주의적인 성향도 있다 보니 절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이 커갈수록 몸은 편해지는 면이 있는데, 마음은 복잡한 날들이 많았습니다. 둘째는 그나마 둘째 특유의 애교와 눈치가 있어서 좀 덜하지만, 첫째는 가끔은 엄마인 저에게도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두 아이가 오직 집안에서만 24시간을 보내다 보니 아이들 간의 마찰도 심해졌고, 두 아이 모두 내부에 쌓인 에너지를 풀지 못해 투정도 더욱 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훈육’을 해야 할 일도 많았습니다. 아직 훈육을 하기에는 어린 둘째에게는 안 되는 것을 안된다고 분명히 주의를 주는 정도로 끝을 냈지만, 이미 네 살이 된 첫째에게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도 어디서 훈육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으니 그저 책에서 읽은 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동안 육아서를 꽤 많이 읽었습니다. 나의 서투름 때문에 아이를 제대로 키워내지 못할까 봐 불안했거든요. 기댈 곳은 책뿐이라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책으로 육아를 배웠다고 할까요? 하지만 현실의 육아는 책과는 달랐습니다. 어쩌면 제가 본 책들이 제 아이들에게는 맞지 않는 내용을 다룬 것이었을 수도 있고, 적용하는 제가 서툴렀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순간 책에 쓰인 대로 아이를 키우려는 시도 자체가 도리어 저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결코 책에 쓰인 활자처럼 자라지 않았거든요.
그때부터 책을 내려놓고 아이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의 성향과 기질을 보다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어요. 첫째의 경우에는 어린이집 선생님과의 상담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양가 부모님들이 바라보시는 두 아이의 모습에도 귀를 기울였죠. 아동 상담을 주로 하시는 선생님과 상담도 했습니다.



가만 보니, 첫째는 감정적으로 아주 예민한 아이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이 수용되지 못하는 것을 가장 견디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리고 훈육 상황에서 제가 훈육을 한답시고 아이에게 ‘화’를 냈던 것이 아이에게는 일종의 공포로 다가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화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언제나 표정과 목소리에 화가 잔뜩 묻어있었습니다.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동안 나는 내 아이를 위한 훈육을 한 것이 아니구나. 그저 책에서 읽은 것을 그대로 적용하려 했고, 내 기분과 감정을 아이에게 쏟아내는 데 급급했구나.’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아이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사랑아, 그동안 엄마가 너한테 무섭게 했었지? 엄마가 네가 잘못한 것을 가르쳐주려고 했던 건데 방법이 잘못되었던 것 같아. 미안해.”
아이가 그 말을 알아들었을지, 못 알아들었을지도 모르면서 계속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이제 절대로 엄마가 소리 지르거나 무섭게 쳐다보지 않을게.”
그런데 아이의 다음 말이 저를 무척이나 아프게 했습니다.
“나는 엄마가 소리를 지르거나 무섭게 쳐다보면 너무 겁이 나. 그래서 나도 소리 지르는 거야.”
그동안 아이가 소리를 지르면 소리를 지른다고 다시 혼을 내었었는데, 그것이 무서운 엄마를 대하는 일종의 방어기제였던 겁니다. 저는 까마득히 몰랐습니다. 그냥 반항하는 거라고만 생각하고 그 고집을 꺾어놔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 집에는 ‘소리 지르지 않고 예쁘게 말하기’라는 규칙이 생겼습니다. 저는 그 규칙을 지키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이를 악무는 인내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싸우고, 고집을 부리고, 떼를 쓰며 웁니다. 하지만 그 상황이 진정되기까지의 시간이 아주 많이 단축되었습니다. 제가 같이 화내고, 소리 지르는 것만 하지 않았을 뿐인데도 그랬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마음을 진정하고 나면 아이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줍니다. 그게 안 될 만큼 저도 화가 났을 때에는 차라리 입을 다뭅니다. 아이가 다리에 매달려 울고 불며 짜증을 부려도 눈 딱 감고 아무 말 없이 제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버팁니다. 제 마음이 가라앉은 다음에야 차분히 아이를 기다리고, 아이의 마음을 들어 줍니다.
얼마 전에 읽은 『부모 인문학 수업』이라는 책에서 아주 마음에 담을 만한 몇 개의 문장을 만났습니다.
“중요한 건 일관성보다 사랑이다. 분노가 나를 공격해도 사랑하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부모는 사랑의 언어로 아이 마음에 다가서야 한다. 오직 그 방법만이 아이를 움직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것을 우리가 배울 필요는 없다. 상황도 다르고 실패한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 하나 자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은 반드시 배워야 한다. 언제나 시작은 사랑이다.”
결국 훈육의 다른 말은 사랑인가 봅니다. 잘못을 지적하더라도 그 바탕에는 ‘언제나 너를 사랑해’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그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혼이 나는 동안에도 엄마 혹은 아빠의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도록 말입니다. 부끄럽지만 이렇게 말하는 저도 가끔은 사랑이고 뭐고 다 잊어버릴 만큼 화가 나서 스스로 정한 규칙을 깨고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참 어렵습니다. 부모의 길이요.
하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표를 낼 수 없는 일이 바로 부모의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책임’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 아이를 바르게 가르치는 일이 어렵고 힘겨워도 끝까지 잘 해내 보아요.
우리는 금쪽같은 ‘내 새끼’의 세상 하나뿐인, ‘엄마, 아빠’니까요.
훈육 그것은 사랑의 다른 말입니다. by 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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