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2개월째 아이를 가정보육 하고 있습니다

나는 32개월째 아이를 가정보육 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32개월째 아이를 가정보육 중이다.

아이가 꽉 채운 세 돌을 맞는 내년 3월쯤 기관에 보내리라 마음을 먹고 입소를 결정해둔 상태지만 그 결심이 실행으로 이어질 지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아이를 3년 동안 내 손으로 키우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다름아닌 남들의 참견이었다. 돌쯤에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실 때문일까? 아이가 돌이 될 즘 부터 지금까지 근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주변으로부터 ‘왜 기관에 보내지 않느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아야했다. 때로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기관에 보내야 하지 않겠니?’, ‘언제까지 아이만 키울거니?’ 하는 선 넘은 조언도 들어왔다.

그런 질문이나 조언을 들을 때 마다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은 내가 그들에게 솔직하게 나의 생각을 말할 수 없어서 생기는 고구마 백 개쯤의 답답함 때문이었다. 왜 말 할 수 없었냐 묻는다면… 음. 나는 그들과 똑같이 무신경한 사람이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어린이집에 안 보내면 아이의 사회성이 결여된다는 둥, 발달이 늦을 수도 있다는 둥, 저주 같은 이야기를 배려없이 하더라도, 거기에 대응한답시고 내가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는 이유를 언급해서 편치 않는 마음으로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을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여태 솔직하게 밝힌 적은 없지만 내가 기관에 안 보내고 세 돌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아이를 끼고 키우는 이유는 단순하다.

나의 아이는 적어도 30개월 전까지 엄마와 떨어질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지 않아 보였었고,

나도 아직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기 싫었고,

보내지 않고 직접 키울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가 준비가 되지 않아 보였음에도 기관에 보내려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아이가 16개월쯤이었다. 나의 멘탈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지친 하루 끝에 찾아오던 소소한 보람이나 행복감조차 0에 수렴해 갔다. 내 개인의 삶이 소멸되는 느낌이랄까? 사회로 복귀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밀려왔고, 어쩌면 복귀할 수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한없이 불안해졌다.

이런 불행한 마음으로 키우느니 기관에 맡기는 편이 아이에게도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어린이집 입소 대기 신청을 했는데 운 좋게 얼마 후 연락이 왔다. 입소는 아이가 두 돌이 되는 이듬해 3월 예정이었다. 이 길고 긴 터널 같은 독박 육아가 끝나는 시점이 정해지고 나니 힘이 샘솟았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21개월쯤이 되자 아이의 재접근기가 시작되었다. 뭐든 엄마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통에 남편이 맡고 있던 아이의 목욕이나 밤잠 재우기까지 온전히 나의 몫이 되었다. 그나마 아빠가 육아에 참여하는 동안 내가 가질 수 있었던 찰나의 휴식시간이 아예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런 아이의 변화는 심히 짜증스러웠고 나중엔 분노까지 일었다. 나는 그 부정적인 감정들 속에서 다시 결심을 했다.

어린이집에 전화를 걸어 입소를 취소한 것이다.

그 이유는 나를 힘들게 하는 아이의 모든 행동들이 ‘미숙함’ 또는 ‘세상에 대한 낯설음’의 표현이었고, 아직 엄마 품을 벗어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명확한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준비가 되지 않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 놓고 여유를 누린다고 해서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임을, 도리어 죄책감을 느낄 사람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이를 너무 어렸을 때 어린이집에 보내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려던 이야기는 ‘기관에 보내고 안 보내고, 그 답은 절대적으로 나와 아이의 마음과 상황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아이나 부모의 마음이 준비가 안되었다면 기관에 보내지 않는 것이고, 상황이 어쩔 수 없거나 아이를 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확신이 들면 보내는 것이다. 각자 더 편익이 있는 쪽을 선택할 뿐이란 말이다.

그런데 육아 정보 플랫폼이나 커뮤니티에서 ‘3세 애착’ 관련한 글이 등장하면 댓글창에선 기관에 보내는 엄마와 보내지 않는 엄마 사이에 거의 패싸움이 벌어지다시피 한다. 재밌는 점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선택이 아이에게 미칠 수 있는 악영향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엄마가 끼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해주는 것보다는 기관에 가서 뭐라도 배우고 오는 게 낫죠.”

“1대1로 엄마가 케어 해 주는 거랑 선생님이 여러 명 봐주는 거랑 같겠어요?”

또는 상대방이 가지고 있음직한 열등감을 건드린다.

“자기 커리어 때문에 그 핏덩이를 어린이집 보내는 건 이기적인 거죠.”

“애들이 크면 엄마가 집에 있는 거 창피해 한대요.”

도대체 저건 무슨 심보들이란 말인가.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자유지만, 같이 애 키우는 처지에 굳이 저런 가시돋힌 말들을 해가면서까지 싸워야 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보통 둘 다 좋은데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는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포기한 옵션이 좋지 않은 이유를 찾아 자기 위안을 하게 된다. “나는 ★★ 못 했는데 어쩌지? 아니야 ★★ 했으면 ♡♡가 안 좋았을 거야.”같은 식의 흐름으로 말이다. 엄마들의 가시돋힌 말 또한 그런 자기위안성 발언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엄마들의 댓글들을 자기위안성 문장으로 바꾸어 보면 답이 나온다.

“나는 내 손으로 세 돌까지 못 키웠는데 어쩌지? 아니야. 세 돌까지 키웠으면 아이는 집에서 나랑 심심하게 있으면서 아무것도 못 배웠을 거야.” 혹은,

“나는 아이를 키우느라 경력을 유지 못했는데 어쩌지? 아니야. 나 일한다고 어린이집에 보냈으면 애착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어.”


일과 아이 둘 모두 개인에게는 큰 의미를 가진다. 하나를 선택하고 포기하는 문제가 쉬울 리 없다. 그리고 선택한 뒤에는 또 당황스러운 감정들이 생겨난다. 출산과 육아는 숭고한 일이라고 했는데 그 숭고한 일을 하면서 자존감은 왜 이리 낮아지는지…. 다들 이러고 산다고 했는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 놓고 일하는 게 왜 이리 마음이 불편한 지…. 이렇게 정답이 없는 문제를 풀고 나서 후회나 죄책감에 시달리는 엄마들은 어쩌면 네 선택이 옳다고 누군가 이야기해 주길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 간절함이 엄마 안의 부정적인 감정과 뒤섞여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 저런 못난 댓글들일 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려 했던 16개월 그 때 내가 힘들었던 때를 돌이켜 본다. 비슷하게 아이를 낳은 친구들이 복직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주변 어르신들은 어린이집에 보내야 배우는 것도 있고 사회성도 생긴다고 잔소리를 하셨다. 그리고 늘 전업주부를 향한 사회의 시선은 차가웠다. 나의 마음을 조급하고 힘들게 했던 것은 전부 외부의 목소리 들이었다. 그 때 내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들여다 본 것은 나와 내 아이의 마음이었다. 앞서 말했듯, 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싫었고, 아이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보였다. 다시 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아이를 내 손으로 키우는 것이 나에겐 더 중요했다. 그래서 보내지 않았다.

나와는 다르게 누군가는 경제적인 이유로, 누군가는 자신의 심리 상태 때문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일 수도 있다. 그냥 인정하면 된다. ‘나도 부모인지라 어린 아이를 떨어뜨려 놓는 것이 내키진 않지만 우리 가족의 상황에서는 이게 최선이야.’ 같은 식으로 말이다.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무엇을 배워올 지 아니면 상처를 입고 올 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서툴러도 엄마가 1대1로 케어하는 게 나을 지, 능력 좋은 선생님이 여럿을 케어하는 게 나을 지 그것도 아무도 모른다. 그저 개개인의 가설일 뿐이다. 그런 불확실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당신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들을 근거로 선택하자는 이야기이다. ‘나와 내 아이의 마음, 가족의 형편’ 이런 것들 말이다.


특히 나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자. 일이 너무 소중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당신이 엄마가 되고 나니 일보다 육아에서 더 큰 의미를 찾고 있을 수도 있다. 반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세 돌 까지는 내 손으로 키우겠노라 장담했던 당신이 사실은 일이 너무 그립고 육아가 적성에 맞지 않아 마음의 병이 생길 지경일 수도 있다. 자신이 설정해 놓은 인생의 프레임을 거두고 엄마가 된 나는 어떤 사람인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선택한 뒤에는 당당해지자. 경력단절에 대한 후회나 아이에 대한 미안함 보다는 나의 선택에 대한 확신과 선택의 무게를 견딘다는 자긍심으로 살아가자.

나는 32개월째 아이를 가정보육 하고 있습니다 by 하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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