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파워 혹은 브랜드의 가치는 기본적으로 매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명품 브랜드 중 가장 높은 매출을 올린기업 어디일까요? 바로 에르메스가 아닌 루이비통 입니다. 명품은 어떻게 명품이 되었을까? 오늘은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16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루이비통의 브랜드의 스토리를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프랑스의 대표 브랜드
샤넬(Chanel), 루이비통(Louis Vuitton), 에르매스(Hermes), 까르띠에(Cartier), 로레알(L’Oreal),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에비앙(Evian), 뻬리에(Perrier), 헤네시(Hennessy)

피겨 여왕 김연아 선수의 트렁크를 본적이 있나요? 2012년에 소속 장인이 8개월 동안 혼자서 수작업해 만든 트렁크입니다.
호텔 신라 이부진 사장과 신영자 전 이사장이 이 브랜드 매장은 면세점에 유치하려 대결을 벌였습니다. 이부진 사장이 공을 들여 유치에 성공했습니다.
2011년 개장 첫해 인천공항 면세점 매출 천억 원 이상
브랜드 가치 1위 루이비통의 역사

루이비통(Louis Vuitton Malletier)는 1821년 프랑스의 동부 앙쉐마을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재혼으로 14세 때 집을 나왔습니다. 온갖 잡일을 하면서 2년을 걸어서 파리에 도착해 당시 유망했던 직업 상자 만드는 공방에 들어갑니다.
귀족들이 마차나 기차나 배로 여행을 할 때인데, 17년 동안 이 여행객들의 트렁크를 만들고 짐을 싸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섬세한 패킹 기술을 인정받아 나폴레옹 3세의 아내 외제니 황후의 전담 패커가 됩니다. 유제니 황후의 후원을 받았고 1854년 자기 이름을 건 가게를 시작했습니다.
1854년 루이비통하고 그 아들 조르주비통과 트렁크 제작에서 시작

어릴 적 배웠던 목공일과 패커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를 사용해 물건을 적재하기 쉽고 가벼운 사각형 트렁크를 개발했습니다. 이 트렁크는 요즘말로 하면 셀럽!
프랑스 황후뿐만 아니라 윈저공 부부 어니스트 허밍웨이(Ernest Hemingway), 더글러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 등의 고객들이 사용하면서 가방계의 명품 패밀리가 되었습니다.
루이비통의 모노그램 패턴과 다미에 패턴

인기가 많아지자 골칫거리가 하나 생깁니다. 3초마다 한번씩 보인다는 루이비통. 모조품도 가장 많은 브랜드이기도 했습니다. 그 것을 막기 위해 조르주 비통이 무늬를 잎히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 루이비통의 위기
촌스럽다는 평을 얻으면서 1987년 베르나르 아르노에게 매각
회사가 점점 커지고 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종합적인 명품 업체는 아니었습니다.
루이비통은 1984년 뉴욕과 파리 주식 시장에 상장했으나 가족 경영의 한계에 부딪혔고,
1987년 모에 헤네시와 합병하여 LVMH그룹을 설립했어요.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추게 되는 변화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1997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 마크제이콥스(Marc Jacobs) 영입
브랜드 상품기획부터 광고, 홍보 등 비주얼과 관련한 모든 것을 총괄하는 마크제이콥스를 영입하면서 의상까지 상품 영역을 확장
2002년 무라카미 다카시라는 일본의 현대미술가를 디자이너로 영입해 하얀 가방에 멀티컬러 모노그램을 콜라보레이션 디자인이 대박을 쳤습니다.
마트 제이콥스는 콜라보에 능했고 카니예 웨스트, 다프트 펑크랑 같은 셀럽과 협업을 했습니다. 매출에까지 연결시켜 명품 가방 업체인 루이비통을 종합명품 브랜드로 우뚝 세웁니다.
브랜드 가치와 규모

인터브랜드(Interbrand)에서 선정하는 ‘글로벌 100대 브랜드(Best Global Brands 100)’에 매년 상위에 랭크 되고 있으며, 가장 높은 브랜드 가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74개국에 진출해 총 465여 개의 매장과 18,0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루이비통이 어떻게 모두가 가지고 싶어하는 명품이 되었는지 역사를 알아보았습니다.
고가의 제품이 곧 명품은 아닌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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